<영적 싸움의 본질>
무엇보다 저는 우리가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영적인 싸움임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우물이 막힌 것은 우연히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워하는 블레셋 사람들의 의도적인 행패였으며, 그 안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증오하는 악한 마귀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마귀는 이 세상 사회 속에서 활동하고, 이 세상 문화를 이용하지만, 어디까지나 마귀는 영적 존재이며, 그는 이 영적 전쟁의 목표를 한 순간도 놓치지 않습니다. 마귀는 악하지만, 결코 약하지 않고, 멸망의 길을 걷고 있지만, 결코 어리숙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우리의 영적인 싸움을 위하여 영적인 능력을 구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긴급하고 절박하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아는 바른 진리의 말씀이며,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하여 이 땅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싸움의 향방을 잃게 함>
안타깝게도 절박함과 위기감을 느끼게 하는 현실 속에서 많은 지체들이 우리의 싸움의 향방을 잃어버린 것 같이 보이며, 바로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대적 마귀가 하나님께서 교회에 허락하신 은혜의 샘을 막는 첫 번째 수단입니다.
*간교하고 위선적인 이분법
지체 여러분, 여러분은 이 악한 대적 마귀가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중심 사역을 희미하게 하는 실제적인 방식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믿음’과 ‘구원의 은혜’를 풍성히 듣기보다는 사회적 정의나 봉사, 혹은 우리 삶을 따뜻하게 하는 감동적인 관계에 대해 더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지체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말하는 교회가 이분법적인 사고에 갇혔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이 분들이 아무리 따뜻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다 할지라도 이러한 지체들은 한 가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곧, 우리가 사회적 책무를 감당하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교회와 성도들이 감당해야 할 사회적 책무가 무엇인지 확증해야 하는데, 이 고민이 완전히 생략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고, 연약한 처지의 형편에 처한 이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이웃들과 우리의 삶을 나누어야 할 뿐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 봉사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온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역이 아닌 곳은 단 한 뼘도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사회적 책무에 대해서 말할 때, 왜 자꾸 우리는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종의 사회복지차원의 문제만 한정해서 다루고 있습니까? 교회의 사회적 책무는 결코 사회복지적 활동에 국한되지 않고, 정치, 경제, 과학, 기술, 문화를 포함한 모든 분야를 망라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활동과 책무는 어떤 것도 다른 것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하다 할 수 없으며,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모든 사회적 책무에 각자의 소명을 따라 관계하지만, 교회의 공적인 신앙 모임이 이들 가운데 어떤 하나에 의해 대체되어서는 안됩니다.
자 여러분, 성경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성경의 메시지는 이 세상에 다른 학문을 필요 없다. 대학 갈 필요도 없고, 직장 갈 필요도 없다.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도 쓸데없는 일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메시지는 우리가 무슨 대학을 나왔고, 어떤 일을 하던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며, 그리스도를 믿는 이 믿음과 그 믿음 가운데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성도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받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여러분이 식사를 위해 식당에 가면, 사장님이 무엇이라고 질문합니까? “뭐 드시겠어요?” 이렇게 묻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식당 주인에게 왜 당신은 날마다 ‘먹는 이야기만 하냐? 어려운 이웃들을 생각도 안 하느냐?’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정당합니까? 이처럼,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모든 지체들이 모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살아갈 수 있는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함이니, 우리는 이 신앙 공동체 안에서 항상 이 사명을 굳건히 감당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특히, 우리가 이 사회 안에서 절박함을 느끼고 있는 이 상황일 때에 우리는 더욱 이 초점을 잃어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죽은 정통신앙>
*참된 교리를 영혼의 무덤으로 삼은 사람들
그러나, 저는 오늘 여러분들이 악한 마귀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명력을 마르게 하고 있는 이 시도가 이보다 더욱 간교하게 이루어질 수 있음을 또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즉,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이 시대의 어떤 사람들은 세상의 영을 따라, 교회의 중심 사역을 흐릿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리,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도의 거룩한 삶의 중요성,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은 이신칭의의 교리를 사소하게 생각하는 현대 교회의 분위기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 것보다는 이 세상의 정치와 사회에 관심을 갖고, 특히 현대인들은 복지나 감동적인 행사를 더욱 강조하며, ‘교리보다는 삶’이라는 표어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말씀드린 이러한 교리를 여전히 붙들고 증거하는 교회는 모두 건강하고 굳건하게 참된 교회로 세워져 가고 있습니까? 제가 가까운 목사님들과 교제하면서 자주 듣는 말 중에 하나가, ‘개혁교회’를 추구한다고 말하며 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을 각별히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웨스트민스터 교리를 알고, 하이델베르크, 벨직 신앙 교육서와 같은 바른 교리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고, 또한 이를 탐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는 이 교리를 떠난 사람들만큼 죽어 있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와 같은 사람들을 “하나님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라고 말하며, 이들을 죽은 정통신앙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참된 교리를 자기들 영혼의 무덤으로 삼는 자들입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교리를 믿지 않는 것이 아주 심각한 문제인 것처럼, 성경이 증거하는 교리를 하나님처럼 떠받드는 문제 역시 치명적인 잘못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아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겸손에 대해서 엄청나게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감동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겸손한 사람은 아닐 수 있습니다. 겸손에 대해서 잘 가르치는 사람이 겸손에 대해서 잘 못 가르치고 혹은 겸손을 무시하는 사람만큼이나 교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겸손하기 위하여 겸손을 배워야지, 겸손을 가르치기 위하여 겸손에 대한 지식을 배워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일그러지고 죽은 정통신앙은 이단만큼이나 무익하고 해로울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은 정통신앙은 이단들처럼 아무데도 쓸모가 없을 뿐 아니라, 자기들이 전수받은 그 전통만을 지키려고 하고, 그 외에 모든 다른 지식과 다른 방식의 증거와 역사에 대해 공격적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 죽은 정통신앙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증거하는 메시지의 일부를 듣고, 회개하고 영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증거하는 그 말씀이 자기 자신에게는 전혀 유익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다른 사람은 세우고, 나는 넘어질까 두렵다고 설교한 것입니다.
*영적 갈망이 있는가?
그러므로 저는 오늘 이미 매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교리를 배우고, 성경을 묵상하며,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우리 자신들이 스스로를 점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즉, 과연 우리에게 영적 갈망이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악한 사단은 우리가 참된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을 우리에게 희미하게 하여 교회에 영적 능력을 메마르게 할 수 있지만, 그보다 더욱 간교하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바른 진리와 교훈을 배웠다는 그 사실 자체에 만족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마치 학생들이 좋은 교재를 고르는데는 신중하지만, 정작 그 책을 붙들고 씨름하는데는 관심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학생은 교재를 사지 않은 친구와 전혀 다를 바가 없지 않겠습니까? 지체 여러분, 특히 저는 소위 장로교적 전통 안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열광과 열정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우리가 아무 쓸데없이 시끄럽게 떠들고, 교회를 무질서하게 만드는 것을 옳지 못합니다. 그것은 열광입니다. 그러나, 열광을 조심하기 위하여 열정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심령이 뜨겁고, 거룩한 능력으로 강해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존 웨슬리가 경건했던 그의 어머니 수잔나 웨슬리에게 ‘조용히 말하지 못한다며’ 타박을 받은 것을 아십니까? 죠지 휫필드 역시 주교들에게 ‘당신이 전하는 교리에 대해서 다 인정하지만, 당신이 그 교리를 전하는 방식은 인정할 수 없다’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훌륭한 믿음의 선배들의 모범을 따라, 바른 교리를 바른 자세와 태도로 전하고 들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에게는 거룩한 갈망이 필요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배웠지만, 여러분 안에 그 선하신 하나님으로 인한 감사와 찬양이 없다면, 도대체 우리가 선하신 하나님에 대해 배운 지식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그저, 나는 하나님에 대해 성경이 증거하는 바를 바르게 배웠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것으로 충만해지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엡 3:19)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빌 3:10) 우리는 진리를 알지 못한 채 감정에 치우쳐 열광하는 사람들보다 더욱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며, 의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마치 하나님을 친구처럼 대면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이 세상의 그 어떤 현실보다 더욱 강력한 현실로 자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블레셋 사람들이 우물을 막아도 아브라함과 이삭은 우물을 계속 팠습니다. 이들은 우물을 찾는 일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 생명의 근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성령의 부어짐이 있기를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바른 개혁주의는 단순히 바른 교리를 앵무새처럼 떠드는 것이 아니라, 영적 갈망 가운데 이 진리를 선포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를 위한 기도>
자 여러분, 우리는 과연 지금 어떤 교회에 있습니까? 여러분들에게 이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여러분이 만일 육신의 눈으로만 교회를 살핀다면, 여러분은 교회를 보고 있지만, 교회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 교회는 사람이 적은데, 저 교회는 사람이 많구나. 이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데, 저 교회는 부자가 많구나. 이 교회는 유명한데 저 교회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구나!’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사시 어떤 교회에 대해 아무것도 알리지 못하는 내용들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만나 우리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선지자들 역시 증언한 메시야, 나사렛 예수를 만났다 했을 때, 나다나엘이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는가?” 하였습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의 말을 들을 때, 다른 말은 하나도 안 듣고, 딱 한 마디 ‘나사렛’만 들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예언과 선지자들의 증언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는 예수님께서 ‘나사렛’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보다 더 사람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분임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너는 지금 니가 아는 것보다 앞으로 더 큰 것을 보리니, 곧 인자 위에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교회를 통하여 이 예배를 통하여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찬양과 기도가 하늘 올라가는 것을 봅니까? 또한 지금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의 위로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봅니까? 그것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교회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덤덤하게 신앙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이 교회에 정말 하늘의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겸손히 여러분의 신발을 벗고, 믿음으로 이 성령의 부어주심에 동참하십시오.
영적 갈망을 가지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참된 신자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