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땅에서 첫 번째로 받은 명령

모세가 죽은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간의 광야 생활을 끝내고, 여호수아와 함께 드디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는데요, 이들이 가나안 땅에서 처음 받은 명령은 약속의 땅의 경계라고 할 수 있는 요단강을 뚫고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40년전 출애굽 1세대들이 갈라진 홍해를 건너 애굽에서 빠져나왔던 것처럼, 출애굽 2세대들이 가나안 땅에 처음 발을 디딜 때, 이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흔히 갈 수 있는 경로가 아니라, 범람기가 되어 물이 최대한도로 불어나 급류가 빠르고 강한 요단강을 그대로 관통하여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인솔하는 레위지파의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매고 요단강에 발을 집어 넣는 순간 요단강으로 흐르던 물이 상류에서부터 끊겼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끊겨진 강을 건너 아주 놀라운 모습으로 가나안 땅에 등장했습니다. 이 등장 하나만으로도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온 땅에서 이 땅에 임한 심판의 사자들처럼 빛났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요단강을 건넌 이후, 하나님께서는 요단 강변에서 12개의 바위를 취하라 하셨고, 그것으로 길갈에 세우게 하사, 이를 기념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후,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이 출애굽 2세대들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살면서 이 기념비를 가리켜, 이것이 무엇이냐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홍해와 요단을 건너 이 땅에 오게 하셨다.” 증거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은 단순히 이 세상에 있었던 수많은 정복전쟁 중에 하나가 아니라, 이 땅 나라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나타내는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사명을 위한 명령

여러분은 이 본문에서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지난 시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베푸신 그 놀라운 은총들을 기억하시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안타깝게도 성경을 읽으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골동품을 수집하는 사람처럼 교회의 역사에 관심을 보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있었던 일을 기억한다는 말씀을 아주 단순하게 그 사실에 대해 잊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나간 구속의 사건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3장 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과거에 대한 기억을 잊지 않게 하시는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과거에 얽매기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더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물이 끊겨진 요단강은 단번에 건너가는 것이지만, 그 강을 넘어 그들 앞에 펼쳐진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 감당해야 할 많은 사역들을 위하여 미리 흐르는 요단강을 끊어 건너게 하신 것입니다. 마치 비행기의 엔진이 공기를 뒤로 밀어내며, 기체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처럼, 지난 구속의 역사에 대한 반추와 기억은 매일 우리의 삶에 주어진 삶의 과제를 성실하게 감당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건들을 기억하게 하시는 것은 지금도 이와 똑같은 능력과 권능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일하시는 분임을 드러내기 위함인 것입니다.

지체 여러분 우리의 기독교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이 과거에 역사하신 이 사건들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즉, 이 놀라운 역사와 능력이 지금도 우리 안에 행해지고 있음을 우리가 실감하고 있습니까?

지체 여러분, 진정한 기독교는 우리의 신앙이 실제로 우리의 삶에 어떠한 능력과 역사가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사도들은 교회를 우연히 사람들이 만나서 별 생각과 기대없이 세워진 공동체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교회를 선지자들의 예언을 따라 무너진 이스라엘 왕국의 재건된 새 이스라엘이며,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실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시작으로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한 사람의 인격과 삶과 대속적 죽음을 통하여 건설됩니다. 곧, 사도들은 결코 기독교를 항상 참아야 하는 종교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항상 만족스럽지 못한 우리의 신앙의 모습을 견디고, 예전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좋을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우리에게 아무 능력이 없구나! 한탄해야 하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으로 들어가며, 미문이라는 문에 앉은 거지를 보고, 아, 당신이 예전에 태어났으면 좋았을 것이요. 모세를 만났었다면, 혹은 엘리야를 만났었더라면 좋았을텐데.. 혹은 한 2-3년 전에 예수님이 아직 이 땅에 계실 때, 갈릴리로 오셨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렇게 한탄하지 않았습니다. 물질적인 도움을 원하는 이 사람에게 ‘우리가 가진 것이 없어 당신을 도와줄 수 없으니, 마음이 안타깝소’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이 내게 없지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 선포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통하여 당신의 나라의 영광을 이 땅 가운데 찬란하게 드러낼 수 있는 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변함없는 사명, 흔들리지 않은 믿음으로 감당하라>

*가장 어려울 때에도 낙심하지 않은 이유

그러므로, 저는 오늘 이 말씀들을 우리 삶에 비추어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아주 어려운 때에 처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체 여러분, 저는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이 어려움이 우리 마음에 서글픔과 쓰라림을 줄 수 있겠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환경과 형편은 변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하시고, 그 분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동일하며, 당신의 백성들에게 부어지는 사랑과 능력 역시 전혀 변함이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심지어 참으로 우리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되는 그러한 때에도, 오직 하나님만이 하시는 그 영광스러운 일을 목도하게 될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교회가 놀랍게 부흥했던 시대를 생각해보십시오. 도대체 언제 홍해가 갈라졌고, 요단이 끊겼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평안하고 강할 때였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민족이 더 이상 이 땅에 존재하지 못하게 될 위기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가르시고, 요단을 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가다 결국 아들을 나일 강에 던질 그 때, 이 백성들의 땅에 임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방의 대적들에게 억압과 착취를 당할 때 다윗을 보내셨고, 그 다윗 왕국이 완전히 멸망하여 이 땅에서 사라질 것처럼 보이던 때, 그리스도를 보내사 당신의 백성들을 당신의 능력으로 부르셨습니다.

종교개혁을 통해 교회가 부흥하고 많은 지체들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던 시대 역시 교회사적으로 결코 밝고 긍정적인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역시 그러합니다. 지체 여러분, 성도는 힘이 부칠 때에도 성도는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윗이 시편 121편에서 무엇이라고 찬양했습니까?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오라.’ 이것이 바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고백이었습니까? 우리 조국 교회 역시 그러한 믿음의 선배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며 이 땅의 자랑에 흠뻑 취해 참으로 이 세상이 좋다고 노래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그들 안에 있는 기쁨이 도대체 어디서 온 기쁨인지 스스로 물으며 살았습니다. “나의 이 기쁨이 어디서 온 것인가?” “이 넘치는 평안과 사랑의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성령의 역사 아닌가?”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일이며, 잊지 말아야 할 노래입니다. 과연 우리에게 이 찬양이 있습니까?

 *우리 힘에 맞는 일을 추구하지 말라!

신문을 보니 요즘 목회자들이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지원 프로그램들이 대거 개발되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교회의 월세를 내지 못하는 목회자들이 교회 시설비를 유지하기 위하여 기술을 배우고 직업전선으로 뛰어들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이런 분들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목회자들은 최선을 다해 맡겨진 말씀과 목양 사역에 충실해야겠지만, 목회자가 일을 한다는 그 자체를 문제의 본질처럼 다루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힘겨운 시절을 지나갈 때에도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다움과 교회의 교회 다움에 대한 기대를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목표는 결코 생존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교회는 어떤 곳이어야 합니까? 우리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형편에 있을지라도, 교회에는 요단을 가르고 홍해를 가르사 이 땅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는 그 능력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지금 여러 사람들이 우리의 현실과 형편을 말하며, 그저 교회가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이 어디냐고 하며, 그런 길을 찾고, 그래서 세상에 교회의 교회됨을 나타내는 것을 포기하고 있지만, 교회는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곳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주권적인 뜻을 따라, 우리 모두를 분명히 다르게 사용하지만, 능력의 방식이 다르다고 해서 능력의 깊이와 본질이 달라져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그 어떤 날에도, 하늘의 능력과 기쁨, 거룩함으로 능력으로 이 세상의 모든 형편 가운데 의연하게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삶의 최고의 목적임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소망과 사역의 본질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증거하는 자들입니다. 이 사명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의 기도는 끝이 나고, 거룩한 능력을 메마르게 되며, 교회의 부흥은 이룰 수 없는 꿈이 되고 말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기억하라!

홍해를 건넜던 출애굽 1세대들이 모두 광야에서 죽고, 광야에서 태어났던 출애굽 2세대들이 40년 전 그들의 부모들이 홍해 앞에 섰던 것처럼 다시 요단 앞에 서서 첨벙거리는 강물에 믿음으로 발을 집어 넣는 이 장면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사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것처럼, 이제 이 후손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셔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한 시대가 갔고, 또 다시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전 시대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와 능력으로 이루어진 시대였듯이 이 새로운 시대 역시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와 능력으로 이루실 것을 확실히 하고 계십니다. 바로 이것이 구속 역사의 목적이며, 그러므로 선지자 이사야는 주님을 항상 새 일을 행하신다고 선포했습니다. 구속 역사의 언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보다 음식을 위하여 준비하라 하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 믿음의 선배들 가운데 누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좋은 여행지를 추천하며 죽기 전에 이런 곳을 꼭 가보라고 권면한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아름답게 쓰임 받은 굳건한 일꾼들이 그들의 사역의 비결에 대해 좋은 영화와 연극을 보고 음악감상을 해서 이 사명을 감당했다고 했습니까? 저는 알지 못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 땅을 살아가며 누리는 즐거움과 이 땅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기쁨을 구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밥을 먹음으로 생기는 힘이 있지만, 밥을 먹을 수 있는 힘도 필요합니다.

잠깐의 열락이 지나고 우리 삶이 더 초라하고 견디지 못하게 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일상에 지친 사람들이 일주일간의 해외 여행을 지나고 돌아오면, 마음이 더 기쁩니까? 슬픕니까? 더 기뻐야 여행을 잘 한 것입니다. 그러나, 떠날 때는 일주일간의 휴가가 기대되지만, 다시 돌아올 때는 도리어 이전보다 더 일상이 두렵게 느껴지는 사람은 없습니까? 오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능력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지치고 외롭고 혼란스러운 세상을 잠깐 잊고 도피할 수 있는 대피소가 필요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안은 그러한 기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시는 기쁨은 우리가 그렇게 두려워하고 힘겨워하고 고통스러운 이 세상 한 복판에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외치는 그 기쁨 아닙니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우리 앞에 이 돌들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삶과 예배와 글에서 이 돌들을 발견합니다. 이 돌들은 하나님의 능력의 돌이며, 거룩한 역사의 흔적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도 우리 믿음의 후대들에게 말할 수 있는 이 요단의 돌들이 있습니까? 우리에게도 이 순종과 성령의 역사의 돌들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항상 새로운 역사를 행하시는 분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 이 민족 이 교회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이 능력을 나타내실 분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에도 이 믿음의 돌이 세워지기를 바라며, 우리가 섬기는 이 교회 역시 이 믿음의 돌이 남겨질 수 있기를 원합니다.

댓글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