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3장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 모세의 기도를 담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교회의 부흥과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주제를 위하여 신약과 구약을 오가며, 이 주제와 관련된 구절들을 묵상하며,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과연 우리가 이러한 말씀들이 약속하고 있는 그 영광스러운 신앙의 면모와 얼마나 멀리 동떨어진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쉽고 간편한 마음으로 대하기 어려운 면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라니요? 이는 사람이 구할 수 있는 최고의 영광 아닙니까? 여러분들은 참으로 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으로 인하여 충만해지는 그러한 경험이 있습니까? 저는 오늘 오직 이 아침에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 모두를 도우사 이 말씀 가운데로 우리의 영혼을 이끄시기를 원합니다.

<깊은 영적 침체에서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으로>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은 모세의 평생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의 정점의 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만, 저는 이 본문을 묵상하기 전에, 먼저 이 위대한 기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실 이 영광스러운 기도는 의외로 깊은 영적 침체의 현장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모세의 첫째 간구 : 이 백성을 용서하소서!

모세의 첫 번째 간구는 무엇이었습니까? ‘이 백성들을 이 땅에서 완전히 없애지 말아달라’는 간청이었습니다. 우리는 모세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주 극렬한 진노를 쏟아 붓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들을 시내산까지 이끄는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이들 앞에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하여 시내산에서 40일간 기도하고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서 뛰놀며 먹고 마시며, 마치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의 신을 섬기고 즐기는 것처럼, 참된 예배를 타락시켰습니다. 이들은 진리의 말씀을 거부하고,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도록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을 거절하고, 자기 정욕과 육신의 쾌락을 자기 하나님으로 요청하고 섬기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구원과 그의 구원을 통해 나타내신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더럽혔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 백성을 떠나라고 말씀하시며, 이 백성 전체를 이 광야에서 심판하사, 완전히 이 땅에서 사라지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가장 먼저 이 백성들을 이 땅에서 멸망시키지 않기를 간구한 것입니다. 이 때 모세는 하나님 앞에 이 백성의 용서를 구하면서 자기의 영혼을 포기할 정도로 처절하게 주님 앞에 은혜를 구했습니다.

32장 31절과 32절을 보십시오. 이것이 모세의 첫 번째 간구였습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할 때 모세의 심정을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가지고 온 언약의 두 돌판을 내던져 깨뜨리는 모습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32:19) 모세가 그의 평생에 가장 큰 은혜를 간구하고, 경험한 이 기도는 그가 시내산에서 계명을 받을 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 가장 참담한 경험 속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모세는 죄를 범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보며, 그 영혼이 죽어가는 것과 같은 아픈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이 지금 여러분 평생에 가장 곤고한 때에 있다 생각된다면 여러분들이 기도를 시작하시되, 이 기도의 간구가 우리 삶의 가장 최고의 영광스러운 경험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얼마나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그들의 삶의 가장 깊은 영적 침체의 골짜기에서 가장 깊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낙심하고 실망할 그 힘까지도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드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간청을 따라, 이 백성들에 대한 재앙을 거두시고 (32장 14절), 당신의 사자를 보내사 본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이들에게 허락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33장 1-3절) 그런데, 서두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모세의 기도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모세의 둘째 간구 : 이 백성에게 돌아오소서!

모세의 둘째 간구가 무엇이었습니까? 이 기도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에 대한 용서와 마찬가지로 매우 의미가 큽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자를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모세가 무엇이라고 기도합니까?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시면, 주님께서 주님의 백성이나 저를 좋아하신다는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저 자신과 주님의 백성이 땅 위에 있는 모든 백성과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까?” (33:16) 모세는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날마다 가나안 땅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가나안 땅에 이들의 정체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 가운데,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임을 분명히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 하였지만, 모세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이를테면, 모세는 이렇게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 세상의 바로의 나라나 아비멜렉의 나라들도 다들 비옥한 땅에 자기 나라를 가지고 있는데, 이 백성들도 그저 좋은 땅에서 견고한 성을 쌓고 산다면, 그것이 이 세상 나라와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이 모든 세상 나라들을 다 무너져 내릴 나라들 아닙니까? 이 나라도 그러한 나라가 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릴 구원이 아니지 않습니까?”

오늘날 교회 안에 많은 지체들이 하나님을 믿되, 하나님과 함께 하며,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임재하신 그 임재의 감격과 감사함을 잃어버리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배를 참아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예배가 참아내는 예배라면, 우리가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대단한 건물을 세워놓은 들 그것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지체 여러분, 저는 교회는 빈곤하고, 건물도 없고, 지체들은 모두 가난하고 병든 상태에 처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일들을 우리가 이 땅에서 교회를 섬기며 해야 하는 한 과정에 속한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가 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의 모습에 신경 쓰지 말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정체성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임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존재의 목적이니, 우리는 목적과 수단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참으로 분명히 알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이 사명 앞에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스스로 큰 착각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꽤 좋은 직장을 가지고 있거나, 우리의 경제적 형편이 평균 이상이 되고, 교회가 번듯하게 건축을 하고, 우리가 나름대로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는 것으로 만족해버리지 않습니까? 아니 애당초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 목적과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은 아닙니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표는 가나안 땅에 도착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세는 애굽에서부터 이들을 건져내어 가나안 땅을 향하고 있었지만, 단순히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도착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나름대로의 목표를 가지고 삶을 살아가지만, 우리의 최종 목표가 단순히 우리의 삶의 일상적인 과제를 잘 수행하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삶의 과정 가운데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타는 목마름과 간구가 우리 삶의 진정한 이유와 흔들리지 않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악인의 장막에 거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집에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다고 고백한 다윗과 같이, 하나님 없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보다, 하나님과 함께 광야에 있는 것이 더 좋다고 고백한 모세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최고의 영광이며, 즐거움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돈도 많고 하나님도 잘 믿으면, 돈은 없지만, 하나님만 잘 믿는 것보다 더 낫지 않냐고 말하지 마십시오. 돈과 하나님은 애당초 같은 반열에서 비교가 안 되는 분이니, 하나님을 돈 옆에 세워서는 안됩니다. 돈이나 건강이나 이 세상의 권세나 심지어 우리의 생명이라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위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할 뿐입니다.

*모세의 셋째 간구 : 주의 얼굴의 영광을 보이소서!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이 중심을 보시고, 그에게 이 기도에 대한 응답을 하셨습니다. 주께서는 “내가 친히 너희와 함께 가겠다.”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모세의 기도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를 응답 받은 이 자리에서 그의 기도의 정점으로 나아갑니다. 모세는 이제 하나님의 얼굴의 영광을 보기 원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심을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의 영광을 통하여 보기를 원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모세는 그의 확신이 경험이 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이 기도에 대해서만큼은 어느 정도 제한을 두셨지만, 그러나 우리가 지금 이 본문에서 보아야 할 것을 이러한 초현실적인 기도를 하는 모세의 그 중심입니다. 모세는 이 백성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 백성들의 반역과 불순종은 이제 시작이었을 뿐, 그는 사실상 하나님 앞에 전혀 살아갈 가치가 없는 사람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위하여 수고하고, 봉사해야 할 자신의 사명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알았습니다. 그것은 단 하나, 곧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사는 은혜로부터 주어지는 능력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이 영광이 그의 눈을 마비시키고, 그의 생각을 정지하며, 심지어 그의 호흡을 다하게 할지라도 그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마음과 생각과 영혼에 채워지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이 기도는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얼마나 사모하고 소망했는지 잘 보여주며,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하여 가장 깊은 영적 침체의 자리에서부터 모세가 얼마나 놀라운 영적 충만의 자리까지 나아왔는지 보게 되는 것입니다.

지체 여러분, 우리가 지금 말씀을 나눈 것처럼, 우리는 모세의 기도의 순서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이 기도의 정점에 이르고자 한다면, 당연히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해 통렬하게 회개해야 하고, 또한 우리의 사명의 중심도 굳건히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해야 할 사역의 과정을 무시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을 마지막 순간까지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가 가장 깊은 심연의 나락에 떨어진 때에라도, 그 무엇보다 먼저 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을 가슴에 품어야 합니다. 저는 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사모함이 앞의 기도의 제목을 이끌어 낸 것이라고 믿습니다.

모세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 가서 그곳에서 안락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목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땅에서 육신의 장막을 지니는 동안 이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대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체 여러분, 너무 쉽게 이 영광의 체험을 제한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생각하지도 마십시오. 어떻게 내가 모세나 바울이 보았던 그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인가? 나는 그러한 사람들에 비해 너무나 부족하고 허물 많은 사람들 아닌가? 이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한계선을 미리 우리가 제한할 필요가 없습니다. 도리어, 우리는 이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는 그 경험에 대한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다해 힘을 다해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저는 항상 어제의 나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 저의 매일의 사명임을 믿습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간다는 그 말을 제한선으로 이해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결코 낙심하지 않고 실망하지 않고 조급해 하거나 게으르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영광의 날의 그 영광을 지금 이 땅에서 누리고자 하는 그 열망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이 열망으로부터 모든 신앙의 능력이 흘러 나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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