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남아 있는 우상이 없는가? (출 20:4-6)
연말 연시철입니다. 앞으로 몇 주간, 로마서 강해를 잠깐 쉬며 절기를 따라 몇 가지 주제를 상고하고자 하는데요, 오늘은 본문을 통해 우리의 지난 한 해를 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우상숭배는 두려운 마음에서 자란다.
본문 말씀은 십계명의 제 2계명으로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내용입니다. 우선 저는 여러분들이 이 우상 숭배의 문제를 극복한다는 것이 매우 쉽지 않은 일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우상에서 완전히 자유하려면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두려움이 있는 한, 우리는 항상 우상 숭배로 나아갈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지난 한 주간 병원에 있으면서 같은 방 환자들과 대화해보니, 아직도 점집을 다니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습니다. 지금도 뉴스에서 간간히 들리는 것처럼 고위 공직자들도 무당들과 이렇게 가까이 지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도 모두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이 두려움을 떨쳐 낸다는 것이 연약하고 죄 많은 인간에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하지 말라는 말씀을 성경에 주셨고, 이 말씀을 자주 반복하셨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우상 숭배를 금하시며,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이나 바다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긴 명령은 여러 가지 우상이라는 것이 사람들이 하늘과 땅과 바다와 땅 아래로부터 당하는 일들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들이 한 해를 앞두고 어떤 화를 당하게 될지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기를 바랍니다. 두려움은 마귀가 우리를 넘어뜨리는 가장 중요한 수단 중에 하나입니다.
모든 우상 숭배는 이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 현대 사회는 ‘우상 숭배’와 관한 문제에서 이전보다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우리는 보통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이렇게 ‘과학’ 발전한 시대에 우상 숭배를 하지 말라는 명령은 아무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닌가? 지금도 점집이나 무당집들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지만, 예전에 비하면 그 숫자가 현저하게 줄어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우상숭배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예전보다 더 나아진 것이 사실 하나도 없습니다.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두려움의 크기는 전혀 작아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과학이 발전했으니, 우리는 이제 우리 인생에 대한 염려와 근심이 줄었습니까? 과학은 많은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지만, 또한 많은 문제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게다가 오늘날의 과학은 ‘상업’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장사치들의 돈벌이 수단이 되는 경우도 아주 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많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악한 사단이 이 두려움과 걱정을 그냥 놔두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보십시오.
정말 우상 숭배가 사라졌습니까? 과거의 사람들을 바알이나 제우스나 헤라를 섬기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전 시대의 사람들이 과학적이지 못하다고 쉽게 비웃습니다. 그런데, 바알 신앙을 섬기는 사람들을 바알을 농사의 신으로 섬긴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바알 신앙에는 농사법과 관련된 내용이 상당히 많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태양신 라를 섬기며 ‘피라미드’를 지었는데, ‘피라미드’가 얼마나 대단한 건축 기술이었습니까? 예전 사람들도 다 나름대로 바알 신앙이나 태양신 신앙을 가져야 할 과학적 이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학’을 믿는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수준이 낮아 보였기 때문에, 이러한 신들의 이름을 붙여 놓은 것 뿐입니다. 이들은 ‘신앙’의 이름으로 ‘과학’을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어떻습니까? 이들은 이제 ‘과학’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과학’은 믿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과학’은 증명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제 ‘과학’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습니다.
성경 시대 사람들이 바알 신은 섬긴 것은 바알 신전에 가면 술을 먹고, 쾌락에 탐닉할 만한 종교 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사람들은 누구도 나는 ‘쾌락’에 사로잡혔다고 함부로 떠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앙’이라는 명분을 활용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자신이 ‘쾌락주의자’라는 사실을 떳떳하게 밝히고 다닙니다. 내 삶의 목표는 육체적인 만족이고, 돈이고, 세상의 성공이라고 아무 부끄러움 없이 커밍아웃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우상 숭배의 문제는 더욱 심각합니다. 이제 사람들은 아무 형상도 만들지 않고, 직접적으로 자기 육체적 만족과 정욕을 자기 신으로 삼아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갖지 못할까봐 사라질까봐 매우 두려워합니다.
공동체는 깨지고, 가정은 흔들리고, 부모와 자녀들의 관계에는 성숙한 애정의 뿌리가 형성되지 못하는데도, 사람들은 우리의 육체적 정욕이 만족되지 못하는 일에만 집착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에게는 우상이 없습니까?
-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를 금하신 이유는 우상숭배가 우리를 멸망의 길로 이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우상 숭배를 금지하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바다에 있는 것이나 그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의지하지 말라는 뜻 아닙니까?
왜 하나님께서 이러한 명령을 강조하셨습니까? 그런 것들은 우리를 지켜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5절과 6절을 잘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모든 우상을 버리라는 명령과 함께 하나님께서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증거하고 계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시샘이 많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광을 훼손하는 일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우리가 우상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함부로 대하고 만만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정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남아 있는 모든 우상들에게서 단호하게 돌아서야 합니다.
하늘에 있는 형상은 안 되고, 땅에 있는 형상은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늘도 땅도 바다도, 땅 속에 있는 것도 안 됩니다.
금 신상 앞에 절하는 것은 안 되지만, 돈을 최고의 것으로 추구하는 것은 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간접적인 우상 숭배만을 금하신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우상 숭배도 금지하셨습니다.
이 모든 우상 숭배는 그럴듯하게 보일지 몰라도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앞에 세우게 됩니다.
몸이 아플 때, 진통제를 먹어서 진통을 잠깐 동안 진통을 그치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진통이 멈추었을 때, 병을 치료하지 못하면 더 큰 고통이 찾아오지 않습니까?
과학이든 돈이든 인기든 잠시 동안 우리 삶에 대한 두려움을 잊게 하는 진통제는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붙들고 있으면 결국에 망하고 맙니다.
예전 사람들은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냈습니다. 언제까지 지냈습니까?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냈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런 나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망합니다. 나라의 중요한 일들을 무당 앞에 물어서 결정하면 나라가 망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정말로 공부만 잘하고, 돈만 잘 벌면 되는 것입니까? 다른 것을 필요 없습니까? 하나님의 영광도 모르고, 자기의 죄도 모르고, 거룩한 삶과 상관없이 살아도 됩니까? 그렇게 살면 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를 금하셨습니다. 저는 우리에게 남아 있는 우상이 무엇인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결론. 참된 기독교 신앙은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이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과 우리 인생에 대한 두려움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유명한 신학자이자 목회자인 싱클레어 퍼거슨은 결국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죄는 율법주의와 무율법주의로 구별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 율법주의와 무율법주의는 모두 하나님에 대한 오해에서 시작된다고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즐겁고 행복하기를 바라시는 분이십니다. 얼마나 바라십니까? 참으로 우리가 영생과 복락을 누리게 하기 위해 당신의 영원하신 아들을 죄의 저주를 받는 자리까지 내어주실 정도로 우리의 행복과 축복을 바라십니다.
그러나, 사탄은 아담과 화와에게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더냐?” 이것이 인류 최초의 범죄의 시작 아니었습니까? 사단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원망을 심어줍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마치 하나님은 우리를 싫어하시고 귀찮아 하시고 뭔가 아까워하시는 것처럼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생각하면 너무나 두렵고 벌벌 떨려서 헌금도 하고, 예배도 드리고, 봉사도 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 있는 또 다른 형태의 우성 숭배일 뿐입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랑에 강권함을 받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 모든 거룩한 삶을 살아걉니다.
성도의 가장 큰 기쁨은 거룩함 아닙니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기도하고 예배하고 성도들과 교제하고 성경을 묵상하는 시간이 가장 기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여러분의 신앙은 이 기쁨과 감사와 사랑 위에 세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올바른 신앙의 첫 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한 해를 앞두고 혹시 여러분들 마음에 어떤 두려움이 있습니까? 염려가 있습니까?
이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늘과 땅과 바다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어떤 일을 당하든지 하나님의 자녀들을 망하지 않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인생에는 운명과 팔자와 저주가 없습니다.
두려움에 굴복되지 마십시오.
실제 무당이든 아니면 무당 흉내를 내는 사람이든 여러분들에게 이런 저런 두려움을 줄 때에, 이렇게 선포하십시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 모든 것이 사라져도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영원할 것이라 약속하셨으니, 나는 두려움에 굴복되지 않으며, 무슨 일을 만나든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것이다!”
이 믿음 위에 우리의 모든 믿음과 삶이 세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